부소새(傅绍玺), 남, 75세, 호북성 형주(荆州)시 공안현 유강(油江)동 행복촌 1항 35호에 살고 있다. 우리집이 큰편이어서 우리부부는 빈방을 세입자에게 임대주고 그 수익을 생활에 보태썼다.
2010년 10월께 동가에서 식량과 식용유 장사를 하는 전덕계(田德桂)의 소개로 예우매(倪友梅)는 우리집을 임대하게 됐고 나는 이층에 있는 방 두개를 년 2600원에 그한테 임대줬다.
그가 우리집에 입주하자부터 나는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남편, 아들 다 두고 왜 혼자서 임대방 생활을 하는지? 후에 그와 한담과정에서 안 일이지만 남편의 이름이 원부(袁付)고 건축자재회사에서 기사로 일하다 회사 구조조정때 퇴직했고 예우매는 독실한 법륜공수련자로 공우들을 집에 까지 불러다 놓고 함께 연공하고 /‘법을 공부/’하는 바람에 참을래야 참을 수 없었던 남편이 전에 살던 집을 저가로 팔아버리고 무한에 집을 사고 그리로 이사했던 것이다.
무한에 이사를 했지만 예우매는 한시도 잊지 않고 전화로 공우들과 교류를 진행했다. 부부 갈등으로 가정불화가 심했고 남편과 아들이 수련하지 말라 그렇게 말려도 심취된 예우매는 여전히 매일 이른 새벽에 일어나 가부좌 연공한다 소란을 피웠다. 최종 예우매가 주동적으로 고향 공안현에 내려가 살겠다 했고 지칠대로 지친 남편과 아들은 그를 하고 싶은대로 하라 내버려둘 수 밖게 없었다. 이렇게 예우매는 무한을 떠나 다시 공안현으로 내려와 임대방 생활을 시작했다.
우리집에 입주해서부터 그의 생활은 조용하면서도 신비했다. 입주하자 방에 있는 통풍용 창문을 종이로 도배하고 종일 문을 닫고 안에서 뭐라 중얼댔다. 가끔 삼삼오오 할망구(방언)들이 드나들기도 하고, 그들이 오기만 하면 긴장한 분위기를 조성하며 안에서 뭘 하는지 문을 닫아 걸었다. 호기심에 동시에 세입자에 대한 관심으로 들어가 함께 한담을 하고 싶었지만 그들은 일이 있다며 안에서 문을 잠그고 나를 들어가지 못하게 했다. 후에 용덕진(龙德珍)이 그를 찾아오는걸 여러번 봤다. 그제야 나는 그들이 문을 닫아걸고 방안에서 수련한다는 것을 알았다. 용덕진이 하도관리국(河道局)에 있을 때부터 수련하는 사람이고 전에 내가 알고 지내던 사람이기 때문이다.
예우매는 우리집에 입주해서부터 외계와 접촉이 드물었고 하루에 밥 한끼 먹을 때가 태반이고 정 배고프면 찐빵에 장아찌를 반찬으로 대강 먹었고 뼈만 앙상해서 매일 연공하고 자고 연공하고 자고를 반복했다. 내 마누라 단옥우(段友玉)도 그를 많이 챙겨주는 편이었다. 혹시 어디 아픈데 없는지, 현 인민병원에 가서 검진을 받아야 되는 건 아닌지, 그런데 그는 정색해서 병이 생기는 것은 /‘소업/’이고 사부가 자기에 대한 고험이므로 약을 먹거나 치료를 받는다면 그것은 사부에 대한 무례고 보응을 당하게 될 것이며 자기는 /‘발정념/’만 하면 사부의 /‘법신/’이 와 병근을 뽑아가므로 자연히 낫게 된다면서 쓸데없는 일에 신경쓰지 말라 했다. 가끔 내가 그를 권하면 그는 오히려 나보고 수련하라 하고 /‘승천/’이요, /‘원만/’이요, 그리고 /‘한 사람이 연공하면 온 가정이 덕을 본다/’는 등으로 연공을 시작하라 설득했다.
2010년 12월에 이르러 예우매는 더더욱 연공에 고심했고 늘 사부의 초상화를 마주하고 가부좌하고 /‘발정념/’하고 <전법륜>과 소책자들을 읽었다. 그러나 그의 얼굴이 누렇게 뜨고 하지 부종증상이 있음을 우리는 발견했다. 점점 여위어가더니 최종 침대에서 일어날 수도 없었다. 이런 상태에서도 예우매는 가부좌와 /‘발정념/’을 잊지 않았고 공우들에게 자기가 연공할수 있도록 부축해달라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예우매의 얼굴은 점점 더 누렇게 뜨고 하지 부종이 더 심했다. 나는 건강이 중요하니 연공하지 말고 목숨부터 건져야 되므로 병원에 가라 여러번 그를 권했다. 그러나 그는 고집을 부리며 자기 남편한테 자기가 앓는다는 사실을 절대 알리지 말아달라 애걸했다. 그렇지만 나는 슬그머니 용덕진을 찾아가 그의 남편의 전화를 알아냈고 남편한테 빨리 오라 통지했다. 남편과 아들이 도착해 그를 병원으로 이송하려 했으나 예우매는 죽겠다 위협하며 병원에 가지않고 여전히 침대에서 연공을 견지했다.
남편과 아들이 도착한지 삼일째 되는 날인 2010년 12월 29일 오후 2시-3시께 위급한 예우매를 남편과 아들이 병원으로 이송하던 도중 그는 차에서 숨을 거뒀다. 듣자니 2011년 1월 28일 법륜공 산하의 사이트에서는 예우매가 박해로 죽었다 했다 한다. 이는 사실에 맞지 않는 유언비어임에 틀림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