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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 늦은 깨달음(포토)

2012-06-07 기원 하 다:Kaiwind Auteur:류진(구술)종지(정리)

담조영 생전 사진

중경(重庆)시 량평(梁平)현 신성(新盛)진에 거주, 신성진 농업서비스센터에서 일하고 있는 료진(廖进, 49세)입니다. 저는 1984년 아내 장광령(蒋光玲)과 결혼했고 장모님의 성함은 담조영(谭朝英), 1942년 9월 출생, 생전 신성진 고승촌 1조에 거주, 친절하고 부지런하며 아주 깔끔한 분이었습니다.


1997년 섣달, 친척 주씨댁이 저의 처가집에 와 법륜공이 좋고 좋은데 연공만 견지하면 사람이 병에 걸리지 않고 병이 있더라도 연공을 통해 업력을 없애고 병을 근치할 수 있다 했습니다. 평시에 풍습병으로 다릿심이 신통치 못한 장모님은 자식 여럿을 키우느라 넉넉치 못한 시골 형편에 돈을 들이지 않고도 병을 치료할 수 있다는 말에 넘어가 당장 법륜공을 수련하기 시작했습니다.

장모님 연공시작 초기 저희들은 반대하지 않았습니다. 신체단련은 좋은 일이고 부모님의 건강이 자녀들에게는 가장 큰 복이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연공후 혈육과 가족을 매몰차게 대하는 장모님을 자식인 저희들은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가족 모임이 있을 때마다 저희들은 장모님과 언쟁을 벌였고 장모님은 늘 저희들에게 화를 내셨습니다. “너희 속인들은 내가 하는 일을 절대 이해할 수 없어, /‘한 사람이 연공하면 온 가정이 익을 얻는다/’ 사부님이 말했으므로 때가 되면 너희들이 내가 연공한 덕을 보게 될거야”. 매번 대화때마다 기분 나쁘게 헤어지군 했습니다.

그러나 장모님은 아무리 여러해 동안 연공을 견지했어도 결코 말과 같이 병에 걸리지 않거나 건강을 유지하지 못했습니다. 2003년말 감기에 걸려 2개월간 기침을 하다 나은적도 있었습니다. 전적으로 스스로의 저항력으로 이겨냈다 저희들은 잘 알고 있었습니다.


2007년 여름, 장모님은 기력이 떨어지고 늘 어지럼증이 나고 열이 나고 복통과 설사 등 증상이 동반됐습니다. 당시 장모님은 일상 사소한 병인줄 알고 이를 악물고 극복했습니다.

 

2009년 3월, 많이 수척해지고 자주 손으로 간 부위를 누르는 장모님을 걱정해 물었지만 아무일 없다 대답했습니다. 우리가 병원으로 모시고 가려해도 “사람이 병이 생기는 것은 체내에 흑색물질이 있기 때문인데 주사를 맞거나 약을 먹으면 업을 짓눌러 체내로 도로 내려가게 하며 누르면 누를수록 많아지고 강해질 수밖게 없으므로 병은 절대 치유되지 않는다” 강경하게 거절했습니다. 이렇게 장모님은 하루하루 자신의 병을 지체시켰습니다.


2011년 9월, 장모님의 건강은 하루하루 악화됐고 더더욱 수척했으며 간부위가 아파 늘 허리를 펴지 못하고 주저앉군 했습니다. 건강을 걱정해서 수차 병원에 가 검진을 받자 권했지만 욕설로 대꾸하셨을 뿐입니다. 그후 장모님의 병세는 날로 중해졌고 음식을 드시면 드시는 족족 토해냈으며 복부 통증도 날로 심해졌습니다. 아내가 자기 자매들을 불러 어떤 수를 써서든 장모님을 병원에 모시고 가 검사를 받도록 하기로 합의를 봤습니다.

 

그해 국경절, 우리 일가는 명절 나들이를 구실로 장모님을 모시고 현성으로 출발, 현 인민병원으로 모셨습니다. CT검사 결과 장모님의 간에 종양이 생겼고 상황이 아주 심했습니다. 당장 입원치료를 받아야 된다는 의사의 제의에 장모님은 울며 병원에 입원하지 않는다 야단하셨고 억지로 그를 병원에 입원시켰다간 벽에 머리를 쫗아 죽고 말테라 저희들을 협박했습니다. 흥분된 장모님을 안정시키기 위해 일단 집으로 모셨다 빠른 시일내에 장모님을 입원시켜 정밀검사를 받도록 하리라 우리는 계획했습니다.


2011년 11월 4일 저녁 무렵, 통증 발작으로 손으로 간 부위를 누르며 소파에 쓰러져 계시는 장모님을 저와 아내가 부랴부랴 현인민병원으로 이송했습니다. 검사 결과 이미 간암 말기에 이르렀고 아주 위중했으며 반드시 입원치료를 받아야만 했습니다. 소업에 심취돼 있는 장모님을 입이 마르도록 권해서야 겨우 병원에 입원시켰습니다.

우리들의 말투와 기색에서 불치의 병임을 눈치챈후부터 장모님은 좀처럼 말문을 열지 않았고 우리가 물어도 대답이 거의 없다 시피했으며 늘 혼자서 한숨만 쉬고 조용히 눈물을 흘리군 했습니다. 그러던 장모님은 주동적으로 치료에 협력하기 시작했으며 약이나 주사를 거부하지 않고 여러가지 치료를 받았습니다. 아직도 기억이 생생하기로, 보수적 치료를 받는 동안 장모님은 매일 양약을 3회씩 복용해야만 했습니다. 한번은 부주의로 장모님께 캡슐 한알을 적게 드렸는데 장모님이 한알이 적다 알려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장모님은 너무 뒤늦게 깨달았습니다. 2011년 11월 22일 오후 5시경, 병마는 장모님의 생명을 앗아갔고 장모님은 영원히 우리 곁을 떠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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