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석 생전
저는 왕뢰(46세)라 합니다. 1990년 할빈사범대학 예술학부 성악학과를 졸업하고 모교에 남아 교편을 잡고 있습니다. 저의 선배 언니의 이름은 방석(庞硕), 저보다 10년 선배며 역시 음악학과 졸업생입니다. 1993년 저희들은 저명한 이련충(李连忠)교수님을 지도교수로 모시고 함께 성악을 공부했습니다. 선배님의 음악적 재능이 저보다 훨씬 좋고 음색이 아름답고 매끄러우며 침투력이 강한 동시에 혼자서 작사 작곡까지, 순수 이탈리아어와 정통 영어로 <스페인 아가씨>, <입술은 침묵하고>, <투란도트>, <카르멘> 등 곡을 불렀고 주변 성악계 인사들은 선배님을 성악계의 진기하고 아름다운 꽃으로 전도 유망하다 예언, 선생님도 “방석과 같은 제자를 양성해 낼 수 있음으로 평생 만족한다” 자랑스럽게 말씀하셨습니다.
1997년 여름, 선배님이 책을 파는 노점에서 책을 고르는데 노점상이 성심성의로 수련하면 병을 없애고 재앙을 면하며 피부관리와 건강을 돕고 장수할 수 있다며 <전법륜>을 추천했습니다. 마음씨 착한 언니는 노점상의 말을 듣고 그 책을 사서 읽었습니다. 얼마 후 공원에 목청 연습을 나갔다가 많은 사람들이 법륜공을 연공하기에 따라 함께 연공하기 시작했습니다.
선배님은 매일 아침 시간 맞춰 공원에 나가 연공하고 집에 돌아온 후 <전법륜>을 반복으로 읽고 동수들과 함께 이홍지의 경문을 연구하고 남편과 아들의 존재를 무시한채 집안일에 신경을 쓰지 않아 아들애가 방과후 집에 와 먹을 밥이 없을 때가 다반사였습니다. 이 때문에 형부가 수차 언니와 걸고 들었지만 언니는 여전히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했습니다.
원래 밝은 성격인 언니는 변하기 시작했고 만면에 웃음꽃 활짝 피고 다니던 그가 점차 괴벽하게 변해 수업시간에 침묵을 지키고 결석을 밥 먹듯 하더니 나중에는 만사 제쳐놓고 법륜공수련에만 전념했습니다. 점차 성악에 대한 탐구를 포기하고 1년에 한번씩 진행하는 문예공연마저 미룰 수 있는데 까지 미뤘습니다. 선생님이 수차 권하고 비평했지만 소용없었습니다.
선배님의 이런 이상한 거동에 형부는 조급한 나머지 빨리 법륜공의 수렁에서 헤어나오라 노파심에서 거듭 충고했습니다. 2006년 형부는 참다 못해 이혼을 제출, 생각밖으로 선배님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이혼할테면 하자, 그럼 내 귀도 한결 시끄럽지 않고 수련에 전념할 수 있다”며 쾌히 응낙했습니다. 이혼수속을 마친 후 형부는 아들 유가(刘佳)를 데리고 선배님을 떠났습니다.
2009년 선배님의 건강은 날로 악화됐습니다. 집에서 연공할 때 자주 배가 아프고 연공하면 할수록 더 아픔이 심해져 늘 진땀을 빼며 땅에 쭈크리고 앉아 허리도 펴지 못했습니다. 어느 날, 저와 선생님이 그의 집에 갔다가 병색이 완연하고 기운이 없는 그의 모습을 보고 병원에 가라 했으나 말을 듣지 않아 전화로 형부를 불러 억지로 병원에 이송했습니다.
진찰결과 조기 직장암으로 밝혀졌고 의사는 치료에 애쓰고 협력만 하면 반드시 만족스러운 효과가 있을 것이라며 입원치료를 제의했습니다.
그러나 선배님은 법륜공의 수렁에 깊이 빠져 공법이 모든 병을 치료할 수 있다 믿고 의사의 충고를 들은 척도 안했습니다. 입원은 물론 처방약 마저 먹지 않고 종일 가부좌 혹은 연공 혹은 /‘경문/’을 읽고 이홍지의 CD를 보고 /‘법륜대법이 좋다/’, /‘진,선,인이 좋다/’를 앉아 묵념하고 /‘심득체험/’을 쓰고 집안 /‘정위/’에 이홍지의 초상화를 걸어놓고 하루에도 수차 정례모배를 하며 소업을 도와달라 사부에게 경건하게 기도하고 계속해서 /‘안을 향해/’ 찾았습니다.
힘겹게 몇 달 견지했지만 그의 병세는 더더욱 악화됐고 예전의 예쁜 모습 찾아볼 수 없이 먹는 족족 모조리 토해내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동료들과 친구들이 “어서 병원에 가보렴, 이랬다간 목숨마저 잃는다. 그토록 오랫동안 연공했는데 병이 낫기는 고사하고 말할 맥도 없게 됐는데 아직도 정신차리지 못하냐”며 애써 권했지만 선배님은 자기 수련을 방해하고 지장 주는 사람들이 항상 있다며 /‘갈등을 느낄 때 안으로 찾으라/’는 사부의 요구에 비춰보면 자신이 아직도 /‘마음속에 잡념이 있어/’ 소업이 영향을 받았고 수련에만 전념하면 업력을 깨끗이 없앨 것이라 당당해서 말했습니다.
따라서 선배님은 /‘세상과 담을 쌓는/’ 방법을 채택, 모든 교란과 잡념을 버리고 동수 외의 모든 사람과 연락을 끊고 수련에만 전념했습니다. 자신이 계속해서 수련만 하면 동수들의 도움과 사부의 비호하에 업력을 반드시 없애고 병이 저절로 낫게 되리라 철석같이 믿었습니다.
이렇게 선배님은 계속 수련했고 동수들도 끊임없이 그를 향해 발정념을 했습니다. 그는 시종으로 사부가 시시각각으로 자신의 소업을 돕고 그에게 계속해서 신심을 안겨준다 믿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병은 호전이 없이 계속해서 악화되기만 했습니다. 비참하게도 선배님는 이 악화를 다가올 /‘공덕원만/’으로 업력을 철저히 제거하는 정상현상으로 받아들였습니다.
2011년 5월, 선배님은 끝내 맥없이 병석에 드러누웠습니다. 소식을 듣고 온 형부가 그를 병원으로 이송했고 검사 결과 암세포가 이미 전신으로 확산되여 치료의 가치마저 상실한 시한부 신세를 면치 못했습니다.
자신이 살 가망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된 그 시각에야 제정신이 든 선배님은 동수들을 다 내 쫓아내고 친지들을 만나고 싶다는 마지막 요구를 제출했습니다. 다들 모이자 선배님은 슬픔에 젖어 입을 열었습니다.“저는 아무 잡념없이 전공을 포기하고 친지들을 멀리하고 /‘진선인/’을 견지하며 일심으로 대법을 수련해왔지만 결국은 이 모양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제 와서 뭐라 한들 무슨 소용 있겠습니까, 법륜공이니, 사부의 법신이니 죄다 저를 구하지 못합니다. 법륜공이 저를 이렇게 만들었습니다. 당초에 의사 말씀 듣고 친지들의 말을 들었어야 되는데, 저 정말 후회스럽습니다/…/…”
2011년 6월 5일, 겨우 56세의 선배님은 세상을 하직했습니다. 진기하고 아름다운 꽃이 이렇게 스러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