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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겪은 제로만보(齐鲁晚报)신문사 사건

2010-04-13 기원 하 다:Kaiwind Auteur:왕광천

나의 이름은 왕광천이며 올해 66세로 산동성 제남 모 중학교 전임 부교장이다. 전에 나는 독실한 법륜공제자로 제남시 천교구(天桥区)보도소 보도원이었다. 오늘 나는 내가 몸소 겪었던 “제로만보”사건경과를 통해 법륜공의 정체란 도대체 무엇인지를 세상 사람들한테 알리고저 한다.

1996년 나는 “병을 없애고 몸을 건강히 하기” 위해 법륜공을 수련하기 시작했다. 얼마간 단련후 나는 몸이 많이 좋아졌다고 느껴졌다. 단련을 견지했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미처하지 못한 채 법륜공의 건신효과라고만 믿었다. 중학교 부교장이라는 신분덕분에 나는 바로 천교구 법륜공보도소 보도원으로 임명되었고 그후로 제남법륜공총부와 자주 연락을 취하게 되었다.

1998년 4월 1일 “제로만보”에 “법륜공이란 도대체 어찌된 영문인지를 보십시오”란 기사가 실렸다. 기사는 일부 법륜공수련자들이 주사나 약 치료 거부로 병세악화, 지어는 사망을 초래해 환자가족들이 걱정으로 애간장 태우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그 후로 “제로만보”는 연속 2편의 기사를 더 발표했다. 4월 7일의 기사 “기치를 선명히 하고 과학을 널리 알리자”와 4월 8일의 기사“일단 당신의 사상을 통제, 그 다음 당신을 고스란히 돈을 털어놓게 만든다 ----/‘법륜공대사/’의 축재수완”이었다. 후편의 기사 결말부분에서 한 법륜공제자는 “이홍지 /‘대사/’는 지독하기로 이루 말로 형언하기 어렵다. 사기로 타인의 재물을 수탈하고도 그 사람을 자기앞에서 절절 기며 자기를 숭배하게 만든다. 정말로 생사람을 잡아먹고 뼈도 뱉아내지 않는 놈이다"고 성토했다.

이런 기사들은 법륜공“제남수련총부”골간인원들과 부분 수련자들의 불만을 자아냈다. “제로만보”의 기사를 반박하기 위해 “제남수련총부”는 우리에게 북경“법륜대법연구회”에 보낼 수련심득체험을 써내라 했다. 나는 천교구 법륜공인원들을 조직하여 “우리들의 수련심득 체험”이란 소책자를 편찬했다.

5월 7일 나는 “제남수련총부”에서 주최하는 각 구역 소장 회의에 참가했다. 회의에서 장수강(张寿强)은 너무 연약하고 심도가 부족하다는 “법륜대법연구회”에서 “우리들의 수련심득 체험”에 대한 평가의견을 전달했고 어떻게 “도리를 따지는”데 더 큰 힘을 실을가에 대한 토론을 진행하도록 했다. 회의는 퍼그나 길게 끌었으며 참석자들은 “금후 그 누구든 그 어떤 단위든 법륜공을 반대하기만 하면 공개적으로 대항해 나서기”로 합의를 보았다. 당시 나는 학교일이 별로 바쁘지 않고 가정일도 많지 않았으므로 “제로만보”를 찾아가 “도리를 따지는” 일에 발벗고 나섰다. 나는 연공지점 학원들을 조직하여 “제로만보”행위를 성토하는 일에 전념하고 선후로 4차씩이나 “제로만보”를 찾아갔다. 하지만 강유력한 통일 조직이 없었기때문에 찾아가는 사람들이 집중되지 못해 참여인원이 많아 70-80명, 적을 때는 10-20명뿐이었다.

5월 31일 오전 8시, 나는 장수강이 제남 천교구 공인신촌 북촌유치원(법륜공수련자 모임장소)에서 주최한 “제남수련총부”와 각 구역 지점책임자 회의에 참석했다. 회의 석상에서 장수강은 5월 29일 새벽 “법륜대법연구회” 왕치문이 내린 “5월 30일 제남부근의 법륜공학원들을 산동성 위원회와 신문사쪽으로 집합시키라”는 전화지령을 전달했다. 이홍지가 책에서 “연구회”에서 하는 모든 일들은 모두 각종 방식으로 그의 동의를 거친것이라고 명확히 말했기에 나는 연구회의 결정이자 바로 사부의 지시라 생각했다. 나와 기타 참석자들은 “제로만보”신문사를 둘러싸고 난동을 피울데 대한 결정과 구체 행동방안을 짜고 될수록 더 많은 학원들을 참여시키기로 결정했다. 그 목적은 “제로만보”의 공개사과를 얻어내고 그 어떤 개인이나 조직이 법륜공을 감히 거역하지 못하게 만들기 위해서였다.

5월 31일 오후 나는 연공지점 학원회의를 열고 학원들을 참가하도록 동원했고 그들에게 각자 신문을 보고 “자각, 자원”으로 “도리를 따지려 왔다”고 말하라 시켰다. 6월 1일 아침 6시반, 나는 일찍 “제로만보”신문사에 도착했다. 그후 육속 많은 대법학원들이 몰려왔다. 8시경 약 1000여명의 학원들이 “자발, 자원”으로 “제로만보”신문사 정문 동서양측에 모여 사과를 요구하며 정좌를 벌였다. 현장에 가지 않은 법륜공수련자들은 “정법”의식이 없는자 취급을 당했다. 이번 난동때 역하구(历下区) 법륜공보도소 정혜평(程惠萍)은 10여명 대표를 거느리고 “제로만보” 광고부 사무실에서 신문사 영도들과 담판을 진행했다. 6월 2일 “제로만보”에 공개사과 문장을 낸다는 답복을 받아내고서야 법륜공수련자들은 10시경에 자리를 떴다. 난동은 전후로 2시간 남짓 지속되었다.

6월 2일 “제로만보”는 “독자들에게 삼가 아룁니다”란 제목으로 “기공문제에 대해 당사는 응당 보도나 쟁론을 하지 않는 원칙을 견지해야합니다. 심사가 허술한 관계로 당사는 이런류의 보도를 실었습니다. 독자들에게 사과를 하는 바입니다”라는 짧은 글을 실었다. 제남법륜공골간분자는 이에 크게 불만했고 나도 내용이 너무 모호하여 대법에 사과하는 부분이 없다고 생각했다. 6월 2일 오후 나는 6월 3일 “제로만보”를 찾아가 더 큰 규모의 “정좌”를 벌여 계속해서 “제로만보”에 압력을 가하라는 지령을 받았다.

6월 3일 아침, 나는 일찍 “제로만보”신문사에 도착했다. 이미 많은 법륜공수련자들이 신문사 정문 동서 양측에서 정좌를 하고 있었다. 역시 정혜평이 각 대표들을 인솔하고 “제로만보” 5층 회의실에서 신문사 영도들과 담판을 진행, 이번 담판은 8시간이나 걸렸다. 담판대표들이 나와 모인 사람들을 향해 손을 흔들자 다들 서서히 흩어졌다. 그 동안 신문사밖에서 “정좌”를 하고 있는 제자들을 에워싼 구경군들이 많아 교통체증이 생겼으며 교통질서에 영향을 주었다.

사후 이홍지는 경문에서 난동에 참여한 사람들를 크게 칭찬하고 참여하지 않은 사람들을 비평, “이번 사건을 통해 일부 사람들이 근본적으로 보통 사람들의 관념을 개변하지 않았다는것을 폭로했다”“관건적일 때 내가 당신들더러 사람과 결별하라고 할 때 당신들은 오히려 나를 따라 가지 않는다. 매 한 번 기회가 더 있을 수 없다”라 했다.

 

(Kaiwind.com, 2009-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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