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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또한 평범하고도 행복했던 생활을 가졌었습니다

2015-01-19 기원 하 다:Kaiwind Auteur:왕진동

편집자의 말: 전 법륜공 심취자 왕진동(进东) 2001 1 23일 섣달 그믐날 천안문광장 분신자살 사건 참여자 중 제일 먼저 자기 몸에 불을 단 사람이다. 2001 8 17, 북경시 제1중급인민법원은 그에게 유기징역 15, 정치권리 박탈 3년 형을 선고했다. 2003 5, 교도소 복역 중인 그는 자신이 법륜공에 심취되어서부터 천안문광장 분신자살 그리고 최종 각성, 전향하기까지의 우여곡절의 과정을 담은 아래의 글을 써냈다. 왕진동의 자서를 통해 우리는 /‘1.23/’ 천안문광장 분신자살 사건의 진실을 제대로 알아볼 수 있다.   

나 또한 평범하고도 행복했던 생활을 가졌었습니다

저의 이름은 왕진동(进东), 51, 전에 하남성 개봉()시 모순(矛盾)그룹 기사반 기사였고 하남성 개봉시 법원가 33호에 살았습니다. 아내 하해화(何海)는 개봉시 내의공장에 근무하다가 실업했고 딸 연연(娟娟)은 올해 스물세 살인데 취업 대기중입니다. 저는 2001 1 23일 오후 천안문광장 집단분신자살 사건에 참여했고 제일 먼저 자신의 몸에 불을 단 사람입니다. 2001 8 17일 북경시 제1중급인민법원은 고의 살인죄로 징역 15, 정치권리 박탁 3년형을 선고했고 현재 하남성 정주감옥에서 복역중입니다.   

2001 1 23일은 중국 인민이 새로운 세기와 새 천년을 맞는 첫 섣달 그믐날이었습니다. 사교 법륜공조직의 열광적인 심취자였던 저는 그날 천안문광장/—중국인민의 마음 속 성지에서 국내외를 경악시킨 집단분신자살 사건을 벌였습니다. 불시에 사회적으로 의논이 분분했지만 미국으로 도주한 법륜공조직과 이홍지는 나서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천안문광장에서 죽음으로 이른바 /‘호법/’을 벌인 사람들이 자기들 제자, 법륜공 수련자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분신시 왜 결가부좌를 틀지 않았냐며 왕진동이 대법제자가 아니라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또한 왕진동 등 7명이 천안문광장에서 벌인 분신자살은 사오(邪悟)에 빠진 사람들의 순수 개인 행위이고 대법과 무관하다며  왕진동 일가 세 식구가 한 가족이 아니라 정부에서 수매한 일자리를 잃은 노동자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고 심지어 왕진동이 입은 화상이 화장한 효과라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사실이 웅변보다 낫다고 지금 저는 법륜공을 수련한 끔찍했던 4년간의 과거사와 /‘1.23/’사건 전후의 사상 발전변화 과정을 뒤돌아 봅니다. 이 사사건건이 제가 어떻게 어리석음에 빠졌고 어떻게 죽음의 사선을 넘어 새로운 삶을 향했는가를 충분히 설명해 주리라 믿습니다.   

저의 고향은 하남성 활()현 초호(焦虎)향 초호촌(초호장)입니다. 옛날부터 큰 장터가 있어 유명해진 곳입니다. 저의 집은 그 장터에서 동남방향 자그마한 울안에 있었습니다. 1951 1 8, 저는 그곳에서 태어났고 1957년 가을에 아버지가 저를 개봉으로 데려갔습니다. 소학교에 입학할 나이가 되었던 것입니다   

저의 본명은 왕수동(王秀)인데 고향 사람들은 습관적으로 저를 동뉴(东妞)라고 불렀고 소학교를 졸업했을 때 저 스스로 지금의 이름으로 바꿨습니다   

소학교 때 저는 장난이 아주 심해 놀기를 좋아하고 공부하기 싫어했습니다. 4학년 때부터 성적이 내리막길을 걸어 아버지가 늘 화를 내셨고 이 때문에 매도 많이 맞았습니다. 아버지를 화나게 해드리고 싶지 않았지만 공부가 통 머리에 들어오지 않았다. 가끔 이런 제가 스스로도 미워하지만 놀음에 빠지기만 하면 모든 것을 새까맣게 잊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소학교를 졸업한 후 저는 구역에서 꾸린 /‘일하면서 공부/’하는 초중에 입학하여 하루는 공부하고 하루는 일을 배웠습니다. 저의 전공분야가 조립가공이었습니다   

그때 우리 가정 식구 일곱 명이 아버지 한 사람의 월급으로 살았는데 생활난이 심했지만 아버지는 직장에서의 보조금을 타기 싫어 저를 퇴학시켜 일자리를 찾게 했습니다. 마땅한 일자리가 없어 저는 시키는대로 아버지가 근무하는 공장의 기계조립 작업장에서 의무노동을 했습니다   

아버지는 제가 마음속으로 가장 존경하는 분입니다. 공장에서 줄곧 현장 주임을 맡았고 일에 열심하고 착실한 분이었습니다. 1960, 1961년 자연재해 때 자전거를 빌려서 저를 태우고 시골에 내려가 산나물을 캐기도 했고 일찍부터 저는 생활고를 체험했습니다. 노고와 영양부족으로 부종이 생기고 간염을 앓던 아버지가 1965년 어느 날 의학전문대학 부속병원에 입원해 비장적출 수술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마에 콩알 같은 땀을 흘리면서도 의사들과 주변 사람들의 물음에 늘 미소 짓는 얼굴로 대답하셨고 아무리 아파도 신음소리 한번 내지 않았습니다. 그때 제 나이 겨우 열네살, 매일 아버지 곁을 떠나지 않았기에 아버지가 얼마나 강인한 분이신가를 너무 잘 알았고 향후 그 어떤 고통과 불행에 임하게 되더라도 아버지를 본보기로 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저는 임종을 앞둔 아버지 앞에서 “걱정 마세요, 어머니께 티끌만한 서운함이 없도록 해 드리고 동생들을 잘 돌보겠습니다”고 맹세했습니다   

1976 4, 저는 개봉시 일용화학용품공장(일명 모순그룹회사)에 취직해 운수반 기사로 일했습니다. 저는 이 직업을 애착했고 고생을 마다하고 착실하게 상사들이 맡긴 각종 임무를 적극적으로 완성했으며 주변 동료들과도 사이좋게 지냈습니다. 1992, 아내가 공장 경영난으로 실업을 했고 마침 오조문(午朝) 동쪽에 새로 /‘관광용품 시장/’이 들어설 때라 아내에게 시장에서 매장을 얻으라 했습니다. 처음으로 매장에 선 저희 부부는 고객이 물건 사러 들어오면 쑥스러워 저절로 얼굴이 벌개지곤 했고 그러다 차츰 적응되어 장사에 열을 올렸습니다. 1993 12 31, 개봉시 철탑공원안에 45짜리 매장을 얻어 자리를 옮겼고 /‘취보재(宝斋)/’라는 간판을 걸었습니다. 개업 후 과연 장사가 잘 돼 품종을 늘려 경영 확장에 나섰습니다. 아내 혼자서 고생스레 상점을 경영하다가 1998년 제가 퇴직을 해서 아내와 함께 경영에 나섰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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