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군(李树军), 중계충(仲继忠), 이연정(李艳廷), 장진민(张振民), 요옥우(姚玉友) 등은 모두 요녕성 객좌(喀左)현 사람(이연정 한사람이 곤도영자향 곤도영자촌이고 나머지 네사람은 모두 평방자진 삼대촌)이다. 2001년 4월 이수군은 문도회(门徒会)를 신봉하다 그만 주화입마돼 버렸다. 동문교우인 중계충, 이연정, 장진민, 요옥우 등은 이수군의 병을 고쳐달라 기도하다 이수군을 죽음으로 몰았다. 네 사람은 이로 인해 뼈저린 후회속에서 각각 4~10년의 감옥살이를 해야만 했고 행복하던 다섯 가정이 엄청난 대가를 치르게 됐다.
1998년 이수군, 중계충, 장진민, 요옥우 등은 문도회 신도 이연정의 재삼 권유와 “기도를 하면 병을 고칠 수 있고 무병자는 평안을 지킬 수 있다”는 역설에 넘어가 함께 문도회 사교조직에 가입했다. 이때부터 그들은 /‘신/’을 독실하게 믿고 종일 경문을 외우고 기도를 올리고 스스로 벗어날 수 없는 상황에 빠졌다.
2000년 4월 11일 오후, 이수군은 경문을 외우다 주화입마되어 마구 고함을 질러댔다. 남편의 영향을 입어 문도회의 /‘기도를 하면 병을 고친다/’를 깊이 믿던 아내 이봉민(李凤敏)이 제수 양여연(杨丽娟)을 시켜 동문교우인 요옥우를 불러오도록 했다. 저녁 무렵 요옥우, 중계충, 이연정과 장진민 등이 선후로 이수군의 집에 도착해 이수군의 병을 고쳐달라 기도를 하기 시작했다. 당일 밤 이수군의 증상이 조금 안정된후 이연정 혼자만 그의 집에 계속 남아있고 다를 각자 집으로 돌아갔다. 4월 12일 네 사람은 다시 이수군의 집에 모였고 계속해서 그를 위해 기도를 했다. 당일 오후 5시경 이수군의 형부 오헌서(吴宪瑞)가 처남집에 왔다가 어처구니없는 상황을 보고 신고하려 하자 중계충, 요옥우는 이수군을 들쳐 메고 끌고 이연정, 장진민과 함께 중계충네로 왔다. 그들은 이수군을 사랑채의 바닥 널판자위에 눕혀놓고 계속해서 어서 병이 낫도록 해달라 기도를 했다. 그 사이 이수군은 병이 재발해 울고 고함지르며 발광을 했다. 이웃에서 그 고함소리를 들을가 걱정되어 이연정이 한손으로 이수군의 결후 위를 누르고 다른 손으로 이수군의 입을 틀어막았고 중계충이 결후 아래를 누르고 장진민과 요옥우가 손발을 눌렀다. 이수군은 꼼짝달싹할수도, 고함을 지를수도 없게 됐다. 잠시후 그들은 계속해서 그를 위해 기도를 올렸다. 22시경 이수군이 조용해지자 자기들의 행위가 남들에게 들킬가봐 이수군을 다른 곳으로 옮기자 이연정이 제의했고 그들은 차로 이수군을 곤도영자향 와자점촌에 살고 있는 관모의 집에 실어갔다. 그러고나서 장진민과 이연정이 자리를 뜨고 중계충과 요옥우가 거기에 남아 계속해서 기도를 올리다 최종 이수군의 사망을 확인한후 차로 시신을 이수군네로 실어왔다.
34세의 젊은 생명이 이렇게 소리없이 스러졌다. 문도회가 병을 고친다 서뿔리 믿고 까닭없이 남편을 죽였다는 뼈저린 뉘우침과 타 오르는 분노에 이수군의 아내가 공안기관에 그들을 신고했다. 법의관은 이수군의 몸에 남아 있는 목 졸린 자국과 갑상연골 및 후골 골절로 미루어 기계성적 폭력으로 인한 질식치사라 결론을 내렸다.
2001년 6월 15일 요녕성 객좌현 인민법원은 상해(치사)죄로 종계충, 이연정에게 징역 10년, 장진민과 요옥우에게 징역 4년의 유죄 판결을 내렸다.
한 사람이 참사, 네 사람이 옥살이, 다섯 가정의 비극은 바로 문도회의 /‘기도하면 병을 고친다/’가 빚어낸 악과다.
첨부: 이수군 사망 당시 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