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학덕(孙学德), 1936년 산동 제녕(济宁)에서 출생, 1961년 북경에 온 후 줄곧 북경 청화대학 교내 공장에서 근무한 8급 기계조립 기사, 높은 업무 열의로 정년퇴직 후 재고용되어 학생들의 기계조립 실기 수업 강의를 맡았다.
그의 아내 취영(翠英)이 법륜공을 수련했는데 많이 배우지는 못했지만 추진력과 승부욕이 강하데다 손씨가 10살 연상이라서 매사에 많이 양보했다. 1997년 9월 아내가 연마를 시작할 때만 해도 손씨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런데 아내에게 할 일이 생긴 후 집에서 귀찮게 굴지 않고 “진선인, 좋은 사람되기”의 구속으로 성질이 많이 누그러들고 애들한테도 야단법석을 적게 피웠다. 그래서 아내의 재삼 권유로 손씨도 1998년초부터 법륜공을 연마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호황도 잠깐뿐, 1998년 5월 북경TV의 어느 프로그램에서 법륜공 관련 부정적 소식을 보도한 후 아내가 보도원을 따라 방송국 앞에서 벌인 진상 규명 농성에 나섰는데 연속 며칠 동안 다녔다. 그러자 아들이 “엄마는 많이 알지도 못하는데 쓸데 없이 남들 뒤를 따라 나서지 말아요, 나쁜 사람에게 이용 당해요”라고 당부했지만 아내는 새겨 듣지 않고 1999년에 4,25법륜공 중남해 포위공격 사건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일 때문에 참여하지 못한 손씨는 이로 인해 아내의 원망을 많이 들었다. “사부님이 속인과 결렬하라 하는데 당신은 따라 나서지 않고, 매번 기회를 놓치면 다시 있을 수 없어요. 우리가 무엇 때문에 수련해요? 원만을 위해서잖아요.” 하지만 손씨도 손씨 나름대로의 도리가 있었다. “사부님도 확고부동하게 실수(实修)하라고 했잖아. 다른 사람이 나쁘다고 해도 못 들은 척 해, 그에게 기회를 주지 않으면 되잖아!” 매번 이런 일이 생기면 부부는 제각기 자기 주장을 고집하다가 결국 “불(法)의 입장에서 깨닫는다면 어떻게 깨닫던 다 맞다”고 인정했다.
정부에서 법륜공을 단속하자 이들 부부는 “연마가 병을 제거하고 사람들에게 좋은 사람 되라고 가르치는데 뭐가 나쁘단 말인가?”며 납득이 되지 않았다. “나라에서 연마하지 말라면 연마하지 말라는 도리가 있겠지요. TV에서 방송되는 진료와 약을 거부해 사망한 사례를 보세요, 그래도 교훈이 심각하지 않는가요?” 아들이 말했지만 이들 부부는 “그건 다 조작한 것이고 법륜공을 모해하기 위해서다. 연마는 이로우면 이로웠지 해가 되는 게 하나도 없다”고 말했다.
출근을 완전히 그만 둔 후 손씨는 더욱 정진하게 실수(实修)했다. 그들에게 손녀가 있고 귀여웠지만 이홍지가 “명리정을 내려놓고 원만하여 창궁에 오르라”고 요구하기에 그들은 항상 애를 돌보는데 법 학습과 연마 시간을 너무 많이 빼앗긴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아들이 “그럼 우리를 위해서 손녀를 위해서 연마를 그만 두면 안되는가”고 물으면 손씨는 “너희들은 모른다, 인간 세상의 복을 누려봤자 몇 년이겠어? 진정으로 수련되면 영원히 천복을 누리는 거라”고 대답했다. “정념”을 발(发)하는 시간을 맞추기 위해 그들은 아침 6시와 오후 6시, 그리고 정오 12와 자정 12시에 알람 시계를 맞춰놓고 법륜공이 요구한 이 네 시간에 세계 법륜공 연마자들과 보조를 맞춰 함께 “정념”을 발했는데 그 구결은 “법정건곤사악전멸, 법정천지현세현보(法正乾坤邪恶全灭、 法正天地现世现报)”이다. 이 시간에 손녀가 울며 보채도 교란이라고 생각하고 “정념”을 다 발하고 나서야 애를 달랬다. 이런 것들은 다 참아 주는 아들이건만 무엇보다도 두분이 건강검진을 받지 않고 병 진료를 받지 않는 것이 제일 걱정스러웠다.
2005년, 아들이 손씨의 건강상태가 예전과 같지 않음을 발견했다. 잠이 많고 건망증이 심하며 소변이 노랗고 기력이 없어 보였다. 그래서 아버지에게 병원 진료를 받아보라고 권했지만 손씨는 “소업을 너무 많이 해서 그래, 며칠 지나면 저절로 낫는다”고 고집했다. 그때면 어머니도 덩달아 “괜찮아, 우리 연마하는 사람은 사부가 돌봐주기에 위험 걱정 없다”고 덧붙였다. 그들 부부는 정념을 발하는 시간을 늘이고 “법륜대법이 좋다”를 각인한 부적을 목에 걸었는데 이렇게 하면 “사부의 법신이 도와서 잘못된 상태를 바로 잡아준다”고 말했다. 하지만 사실은 소원과 달리 1년을 더 지나니 손씨의 건강이 점점 악화되어 발이 부어 걸음을 걸을 수 없고 뇨실금까지 잦아졌다. 2006년 3월, 아들이 억지로 그를 북경병원제3병원에 모셔갔는데 “아들 노릇을 어떻게 했는데? 왜 이제서야 병원에 왔는가?”고 의사가 책망했다. 검사 결과 손씨는 이미 간암말기에 이르렀다. 청천벽력에 분노한 아들이 집에 돌아가자 법륜공 책을 다 찢어 버리고 부적도 부셔버렸다. 어머니도 소리없이 눈물만 훔칠 뿐, 애당초 이홍지의 “소업설”을 깊이 믿은 게 후회스럽기만 했다. 하지만 세상에는 후회약이 없고 시간은 되돌릴 수 없다. 3개월 후 손씨는 향년 70세로 병원에서 숨졌다.
아버지의 교훈으로 아들은 어머니에게 병원 검진을 강요했다. 검진 결과 고혈압인데 지속적인 관찰이 필요하고 약으로 통제해야 했다. 사실 앞에서 어머니는 더는 “연마하는 사람은 병이 없다”를 선전하지 않고 의사의 분부대로 약을 복용하며 치료를 받았다. 가증스러운 법륜공이 이렇게 노부부를 이승과 저승으로 아득하게 분리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