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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도회에 심취된 아버지 시신 몰래 매장

2017-05-12 Auteur:양생수

사고무친의 외돌토리(53)인 나는 지금 홀로 병상에 누워있다. 몇 일전 나는 자칫 굶어 죽었을 뻔 했다. 다행이 마을 촌장이 적시에 발견하고 병원으로 이송해 죽을 고비를 넘기고 목숨을 건졌다.

나는 농촌 태생인데 섬서성 안강(安康)시 한음(汉阴)현 보계(蒲溪)진 남요(南窑)촌 3조에 살고 있다. 아버지는 데릴사위로 처가살이를 했고 가정에서 별 지위가 없으며 집안 일은 크고 작고 할 것 없이 모두 어머니가 결정하는 것 같았다. 장기적으로 위축감에 빠져서인지 아버지의 성격이 나약하고 워낙 인색해 돈을 쥐면 놓을 줄 모르고 대인관계가 원만하지 못했다.

1985년 겨울, 어머니가 병으로 세상 뜨고 아버지와 나만 남게 됐다. 그리고 논 한 복판에 외롭게 떨어진 방 세 칸짜리 청기와 흙벽돌집 한 채, 어머니가 세상 뜬 후 어머니에게 의지해 살던 아버지는 더욱 과묵해지고 집안 일 등 모든 생활 중임을 나 혼자서 떠메야 했다. 그때 나는 다른 젊은이들과 마찬가지로 아름다운 앞날을 동경했다. 비록 집에 남자 둘 뿐이지만 나는 해마다 계획을 세우고 가정살림을 정연하게 꾸려나갔다. 그리고 이웃마을 처녀와 사귀는 중이었다. 생활이 차츰 호전되어 가고 있는 판에 아버지가 더럭 문도회에 심취됐다. 낮에는 복음 전달을 나가고 밤이면 교회 교우들을 모아놓고 집에서 기도를 했는데 가끔 우리 집이 사람들로 가득 차 떠들썩했다. 시간이 오래자 여자 친구가 참다 못해 헤어지자고 했다. 아버지가 문도회에 심취됐다는 소문이 자자하게 퍼지면서 그 후로부터 나한테 시집 오려는 처녀가 없었다.

나이가 점점 들고 마을의 같은 또래들은 결혼해 애까지 있는데 나는 계속 홀홀단신으로 살아야 했다. 그런데 아버지는 전혀 조급하지 않는 기색이며 여전히 교만 믿고 복음만 전달했다. 1993년 가을에야 아버지가 신비롭게 나한테 색시를 소개해 준다고 하는데 같은 교우고 얼굴이 예쁘다고 했다. 그런데 여자에게 요구 조건이 있은 즉 반드시 같은 문도회 신도여야 한다고 했다. 기왕 색시 찾기 어려운 판에 교를 믿어 고운 색시를 찾는 것도 좋은 일이라고 생각해 나는 쾌히 문도회에 가입했다. 이듬해 봄, 우리는 순조롭게 결혼했다. 우리 일가 세 식구가 모두 교를 믿고 우리 집이 마을에서 조금 떨어져 있어 문도회는 우리 집을 이 지역 근거지로 정했다. 고령인 아버지가 선교 나가지 않고 교회 총무를 전담하기로 하고 나와 아내가 날마다 나가 복음을 전달하고 간증을 전했다.

그 해 겨울 아버지가 채소 씻다가 솜 신을 젖혀 감기에 걸렸는데 연 며칠 기도 올려도 낫지 않고 급성 폐렴으로 넘어가 일주일 후 고열이 나고 경련을 일으켜 사망했다. 아버지가 숨진 그날 밤, 인근의 문도회 신도들이 모여와 시신을 입관하 고 조용히 묻어버리고 폭죽을 터뜨리지 않았다. 이튿날 아침 우리는 여전과 같이 계속 선교하고 기도했다. 1년 내내 곳곳을 전전하던 아내가 어느 날 선교 도중 유산을 한 후부터 다시는 임신이 되지 않았다.

2000년 3통(三通) 정책이 실시되면서 마침 우리 집 터가 도로 공사 구역으로 선정되어 정부 표준에 따라 건물과 토지 보상금 몇 만원을 받게 됐다. 보상금을 받은 3일만에 아내가 그 돈을 챙기고 실종되었다. 아내가 떠난 후 몇 개월 동안 떠돌이 생활을 하며 아내를 찾았는데 우리가 선교 다니던 모든 곳을 다 뒤졌지만 아내의 종적을 찾지 못했다. 마을에 돌아온 나는 반쯤 미쳐버려 홀로 임대 방에 살면서 가끔 마을에서 일품을 팔아 밥 벌이를 했다.

근년에 마을에서 어렵게 사는 나에게 기초생활수급 대우를 해 줬다. 보름 전 류머티즘 지병이 도지면서 좌골 신경통을 유발해 걸음을 걸을 수 없어 이틀 밤낮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하고 밥 한 술 먹지 못했다. 이렇게 소리 없이 굶어 죽는 구나, 내가 체념에 빠져 있을 때 노촌장이 문안을 왔다가 급히 차를 구해 나를 병원에 이송했다.

나에게도 꿈이 있었는데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는지?

(책임편집: 창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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