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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장의 슬픔을 안겨주는 가정 재앙(포토)

2012-10-31 기원 하 다:Kaiwind Auteur:이초제(구술) 곽초(정리)

 

이초제 최근 모습

 

저의 어머니 성함은 유춘화(刘春花), 1953년 3월 출생, 하북성 부평(阜平)현 하장(下庄)향 양도(羊道)촌 사람입니다. 어려서부터 고향의 산간마을에서 자랐고 결혼 후 연달아 딸 넷을 낳았는데 생활고로 동생 둘이나 선후로 요절되고 언니와 저만 살아남았습니다.

 

봉건사상에 깊이 물든 어머니는 이씨 가문의 핏줄을 이어줄 아들 하나 낳는게 소원이었으나 알 수 없는 원인으로 넷째를 낳고는 다시 임신이 되지 않았습니다. 여러 의사를 찾아가고 많은 민속처방약을 쓰고 /‘명의/’를 찾았지만 아무런 효과도 없었습니다. 아들 하나 가지지 못한 게 부모님들의 유감이고 가정불화의 도화선이 됐습니다. 이로 인해 그들은 수없이 서로 화를 내고 다퉜습니다.

 

1997년 2월 이웃 장월금의 권유로 어머니는 법륜공을 수련하기 시작했습니다. 생활이 여의치 않은 어머니는 정신적인 위안을 위해 법륜공에 심취되기 시작했습니다. 마침 이듬해 어머니가 뒤늦은 48세에 임신을 했고 남동생을 낳았습니다. 늘그막에 아들을 본 아버지는 더 없이 기뻐하셨고 이웃들도 끝내 부부 소원을 이뤘다 찾아와 축하했습니다. 그런데 어머니는 법륜공을 수련한 결과고 신통력이 큰 사부 덕에 자신이 아들을 얻었다며 사부를 따라 부지런히 수련하면 모든 일 해결되고 계속 연공을 잘하면 아들의 앞날이 잘 풀린다고 만나는 사람마다 말했습니다.

 

병이 있으면서 집안 식구들이 권해도 치료 받지 않고 오랜 고생과 연이은 생육과 산후조리에 무관심한 탓으로 원래 체질이 약한 어머니가 고령에 동생을 낳은 후 더 허약해졌습니다. 어머니는 산후 금기를 지키지 않고 자주 배를 굶고 사부의 초상화 앞에 반나절씩 무릎을 꿇고 앉아 허약한 몸으로 매일 중얼중얼 아무도 알아들을 수 없는 /‘경문/’만 읽었습니다.

 

1999년 7월, 국가에서 법에 의해 법륜공을 취체한후 원래 법륜공을 수련하던 마을 사람들 거의가 연공을 그만뒀습니다. 심신이 날로 피곤한 어머니를 두고 가족들이 돌아가며 연공하지 말라 권했고 이웃에서도 자주 권했지만 어머니는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공을 수련하지 않고 사부의 보호가 없었다면 내 이 늙은 몸이 어찌 애를 가질 수 있었겠냐?”는 말만 말했습니다. 아들을 낳아준 덕으로 아버지는 어머니의 지나친 행동도 별로 개의치 않았습니다.

 

어머니는 날로 편집적으로 연공에 몰입했고 어린 동생과 집안 일을 내 몰라라 포기, 동생이 배고파 울며 오줌에 흙을 묻혀 온몸이 흙투성이가 돼도 어머니는 옆에서 보고도 못 본체 방치했습니다.

 

2002년 3월, 어머니는 오랫동안 두문불출, 신체단련도 병 치료도 없이, 그리고 산후조리를 제대로 하지 못한 후유증으로 전신 관절이 뻣뻣해지고 온몸이 아프고 대소변 실금까지 있었습니다. 가족들이 연공을 그토록 반대하고 제지하고 이웃들에서도 수차 찾아와 연공을 그만두라 타일렀으나 아무런 소용이 없이 도로 가족들의 성의가 모자란 탓에 연공이 진척이 없다며 노발대발, 온 가족이 자신을 따라 함께 연습하고 앞으로 그 누구든 사부에게 절대 무례해서는 안된다 강요하고 /‘진선인(真善忍)이 좋다/’, /‘법륜대법이 좋다/’를 많이 되뇌어야 온 가정이 /‘복보(福报)/’를 얻을 수 있다 했습니다.

 

주변의 권유를 듣지 않고 병이 나도 약을 복용하지 않고 치료를 거부한 탓에 어머니의 병은 어느새 악화됐습니다.

 

2005년, 뻣뻣해진 관절에서 고름이 나기 시작하고 팔을 들 수 없고 다리를 펼 수 없어 걸음을 걷지 못하고 식사 마저 식구들의 도움을 받아야만 됐습니다. 그래서 저는 언니와 함께 어머니를 억지로 병원에 모셨고 정밀 검진을 받은 결과 어머니의 병은 보통 관절염이 아니라 풍습으로 인한 심근, 심장판막 합병증인데 이미 치료 최적기를 놓쳐버려 보수적인 치료를 진행함과 동시에 단련을 통해 점차 개선해야 한다는 제의를 받았습니다. 이에 어머니는 자신이 병에 걸린 게 아니라 사부가 소업을 도와주고 있고 원만하기 전에 반드시 넘어야 할 고비로 치료할 필요가 없는데 의사가 허튼소리 한다며 믿지 않았습니다.    

 

어머니가 병원에서 치료에 협력하지 않고 단식 투쟁을 벌이는 바람에 우리는 퇴원수속을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어머니는 의사가 준 약 한 알 드시지 않고 식구들이 주의하지 않는 틈을 타서 변기에 버리고 더욱 열광적인 연공으로 갈수록 심해지는 통증을 덜려 시도했습니다. 자주 밤새도록 잠을 자지 않고 눈에 불을 켜고 수없이 입속말을 되뇌이며 구들에 반듯이 누워 계셨습니다.

 

2007년 4월 22일 아침, 어머니는 갑자기 “내가 원만하게 된다, 사부가 곤 오신다”는 말 한 마디 남기고 말문을 닫았고 3일동안 물 한 방울 넘기지 않았습니다. 식구들이 온갖 수를 다 썼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습니다. 결국 아버지가 저희들과 함께 억지로라도 병원으로 모셔 영양제를 맞히려 했지만 어머니는 기어이 거절했습니다.

 

이 상황에서 의사는 “몸이 너무 허약한데다 치료에 협력하지 않아 심장과 폐 등 장기 기능 쇠약으로 이미 너무 늦었다/…/…” 했습니다. 우리는 법륜공의 모진 수난을 다 겪고 뼈만 앙상해 생명의 마지막 종점까지 한 발자국 한 발자국 겨우 지탱하는 어머니를 옆에서 조용히 지켜볼 수 밖에 없었습니다.  4일 후인 4월 26일 새벽 2시, 어머니는 영원히 우리곁을 떠났습니다. 하지만 눈 감는 순간까지 자신을 뉘우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비극은 이로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어머니가 떠나신후 온 가족이 커다란 비통속에 잠겨 뒤죽박죽이 된 와중에 6월 8일, 갓 아홉살인 동생이 어머니의 별세로 정신이 힁해 등교하다 교통사고를 당해 병원 응급실에서 사망했습니다. 어머니와 동생이 연달아 사망된 후 아버지는 처참한 비통속에서 몸부림치다 큰 병을 앓고 지금도 모든 욕망을 포기한 채 정상상태를 회복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행복했던 저희 가정은 이렇게 무너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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