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천성 반지화(攀枝花)시 미이(米易)현 병곡(丙谷)진 사구(沙沟)촌 5초에 살고 있는 호소회(胡绍会, 56세)라 합니다.
최근의 호소회
1996년 5월의 어느 날, 저는 병곡진 거리에서 한 마을에 사는 외숙 장정권(张正权, 미이현 우체국 부국장을 지내다 퇴직, 당시 미이현 법륜공보도소 소장)을 만나 한담하던 중 “최근에 허리가 아프고 다리가 아파 농사일을 할 수 없어 남편과 갈등이 많다” 하소연했더니 “법륜공이 사람들을 솔직하게 말하도록 가르치고 선행을 베풀도록 하는데/…/…제일 좋은 공법으로 우리들에게 좋은 사람이 되라 한다. 이 공을 연공하면 돈을 쓸 필요가 없고 약을 복용하거나 주사를 맞지 않아도 앓는 사람은 병을 치료할 수 있고 병이 없는 사람은 몸을 튼튼히 할 수 있다. 보다시피 내가 너보다 나이 많지만 정신상태가 훨씬 좋고 먹기도 잘하고 잠도 잘 잔다. 여기 책이 있으니 갖고 가서 한번 잃어보라”며 관심조로 말했습니다.
그때부터 저는 허구한 날 늘 외숙 장정권의 댁으로 찾아가 대법제자들과 함께 소책자를 읽고 그 분이 저희들에게 들려주는 연공후의 신기한 이야기들을 들었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저는 법륜공에 날로 심취돼 단순히 병을 없애고 몸을 튼튼히 하기 위한 최초의 수련 목적을 층차 제고와 대원만으로 바꿨습니다. 그리고 주동적으로 돈지갑을 털어 법륜공의 각종 서적들과 휘장 및 이홍지의 초상화를 사고 매일 날이 밝기전에 일어나 책을 읽고 밤 1-2시까지 밤을 지새우며 피곤을 모르고 읽으면서 거의 모든 시간과 정력을 연공과 법 공부에 몰두, 농사일에서 손을 떼고 수련의 수렁에 깊이 빠졌습니다.
외숙은 또 저에게 “연공하여 정진하려면 학원들을 많이 늘여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이때부터 저는 자신이 부지런히 책을 읽고 연공하는 한편 또 적극적으로 주변 사람들을 수련에 동원시키고 시어머니를 중견으로 발전시켜 고부가 함께 다니며 연공을 했습니다.
1999년 7월 22일, 정부에서 법적으로 법륜공을 단속시킨 후에도 저는 여전히 시어머니와 함께 집에서 남몰래 연공을 했습니다.
시어머니는 저를 따라 연공한 후 저보다 훨씬 심취돼 저 몰래 공우들 집에 가서 연공하는 한편 남몰래 다른 공우들과 함께 곳곳에 법륜공의 표어를 붙이고 전단지를 배포하고 그리고 종일 두문불출하면서 법륜공을 수련하고 벽에 이홍지의 초상화를 빈자리 없이 붙여 놓았습니다. 늘 자신이 곧 /‘천당/’을 가고 /‘원만/’한다 하시더니 횡설수설 헛소리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2001년 8월 16일, 시어머니는 저희들의 눈을 피해 중얼중얼 혼잣말을 하고 실실 웃으며 병곡교로 나가더니 물결 세찬 안녕하(安宁河)에 투신했습니다.
우리 현 사파향 산후촌 7조의 법륜공 책임자인 양문회(杨文会)가 불과 38세의 젊은 나이로 2002년 3월 18일에 이웃 도시 서창(西昌)시 호텔에서 투신 자살했고 제가 그토록 존경하던 외숙 장정권도 2002년 11월 9일 심장병과 신장기능 상쇄로 시 중심병원에서 사망/…/…
주변의 공우들이 잇따라 세상을 뜨자 그제야 저는 이 공법이 정말로 문제가 있는 게 아닌가라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2003년 초, 법륜공이 저의 가정에 가져다 준 고통에 대해 반성하면서 이홍지의 연공이 전혀 병을 치료할 수 없고 기적이란 더더욱 있을 수 없음을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악몽에서 헤어나온 저는 정상적인 생활로 돌아와 식품상점을 차려 돈 벌면서 다시 옛날의 행복하고 안락한 생활을 누리게 됐습니다.